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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이경숙 한줄이야기 나를 시집을 주고 당신들만 이남으로 넘어 갔어 등록일 2019-08-09 |
1928년 생으로 분단되지 않았다면 지금 사는 철원군 동송 오덕4리에서 승용차로 1시간여 정도 걸렸을 거리에 고향을 두고 있다. 북강원도 김화군 창도면 안짜개 마을이다. 금강산행 전철을 타고 수학여행하면서 비로봉 오를 당시 일본인을 가마에 태운 한국인 일꾼의 가련한 모습은 생생하게 기억된다.
잣 산을 소유한 집에서 오빠와 언니를 두고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잇따라 부모를 잃고 조부모 슬하에서 자라던 중 숙부네에 입양되어 김화남소학교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광복되면서 김화군은 이북에 편입되었는데, 친정에서 춘천의 오빠에게 의탁하기 위해 월남을 계획하면서 이경숙씨를 결혼시켰다. ‘시집간 딸도 불러다가 같이 데리고 이남으로 넘어 갈 텐데 오빠 부담 줄인다고 하기 싫은 결혼을 시켰다’며 뼈에 사무쳤던지 여러 번 원망을 쏟아냈다.
열아홉살에 결혼하자마자 철원 대위리 하시래 마을에서 시집살이를 하였는데 엄한 시아버지와 시누이 탓에 딸을 낳지 않겠다고 맹세할 정도로 고됐다. 더욱이 올망졸망한 세 아들을 둔 채 부군이 늑막염 수술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시가가 있는 철원으로 돌아와 민통선 내 1만여 평 논농사와 밭농사로 생계와 자녀 교육시키고 나중에는 맹인이 된 시모까지 돌봄을 책임졌다.
그래도 장리쌀 사십가마니를 주고 오덕4리에 집을 번듯이 마련하고, 읍장 추천으로 부녀회장을 맡아 열심히 활동해 인정받아 큰 보람으로 여긴다. 시가를 나와 공무원인 남편을 따라 짧지만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대학공부를 시키지 못했지만 세 아들이 무탈하고 요즘엔 손자 크는 재미로 보내고 있다. 전쟁이 삶에 치명타가 된 이경숙씨는 남북이 막혀있어 철원이 너무 답답하다며 전쟁통에 헤어진 친언니 이름을 부르며 사무치게 그리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