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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이화자

한줄이야기

돌뎅이 같은 내 인생

등록일

2019-08-09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8-09 조회수 : 762
첨부파일 첨부파일 : 5-고성2-이화자3.png (116.2 kB)


1941년 2월 9일, 삼팔선 이북 땅인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에서 2남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5세에 화재로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의붓어머니 구박으로 학교 문턱에는 가보지도 못했다. 6.25 때 피난길을 같이 나섰던 의붓어머니가 도중 개가하면서 남의 집에 맡겨져 말 못할 고생을 했다. 12살에 아버지를 다시 만나 거진으로 왔고, 아버지가 1958년 민통선 일대에 시행된 1차 <난민정착사업>에 참여하면서 고향 땅에 돌아왔다. 아버지를 도와 집안 살림을 일궜다. 스물넷 되던 해인 1964년, 제진 사람 김승복과 결혼하여 2남2녀를 낳아 길렀다.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어 ‘돌뎅이처럼’ 몸을 부려 뒷바라지를 했으나 자식농사는 뜻 같지 않았다. 학업을 중도에 포기한 자녀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 세월에도 여전하다.

그녀 나이 56세에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떴다. 이후 이혼한 큰아들의 어린 두 자녀를 눈물로 키워냈다. 일생의 거친 노동 탓인지, 61세와 77세에 두 차례 큰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하고 나서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면서도, 낙천적이며 활달한 성품으로 자신과 이웃을 돌보며 생활하고 있다.

인터뷰 참여자를 찾아 무작정 명파리 노인회관을 방문했을 때, 낯선 공간에서 처음 말을 나눈 사람이 이화자 어르신이다. 커피를 권했으며, 집에서 싸온 대봉 감을 깎아 주셨다. 서너 시간 국수를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여러 어르신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터뷰 참여자를 찾고, 만나는 과정은 언제나 갈등의 연속이다. 고심 끝에 이화자 어르신을 인터뷰 참여자로 최종 결정했다. 삶 속에서 단련된 언어는 거침이 없었다. 오롯한 ‘내’가 있는 인생.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알고 사는 사람일 것이라는 내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